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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의 분리/분산 및 송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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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로"의 분리분산작전
    "포로"의 분리분산작전
포로분리작업을 담당했던 당시 미보병 지휘관포로분리작업을 담당했던 당시 미보병 지휘관
1952년에 들어서 친공포로들이 수용소 내부에 조직을 만들면서 소요와 폭동사건이 기승을 부렸다. 이 해 2월에는 약 20건의 사건이 일어났고, 3월과 4월에도 각각 25건의 사건이 발생했다.

상황은 계속 나빠졌으며 수용소 내에서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들 사이에 '전쟁'이라고 할 정도의 충돌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것은 죽기 아니면 살기의 살벌한 투쟁이었다. 학살과 잔학한 행위가 다반사가 되었다. 수제무기(手製武器)를 만드는가 하면, 싸움에 대비하여 조직과 숙달 훈련까지 하였다. 이런 일들은 포로들간의 사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인 투쟁에서 빚어진 결과임이 서서히 밝혀졌다.

포로수용소가 있는 곳은 지역이 좁고 막사들이 서로 밀집되어 있으며 인근 민가와도 가까운데다 경비 병력도 충분치 못해서 포로를 통제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통제하기 어려운 대규모의 포로가 한 곳에 모여있다는 사실은 위험한 일이었다. 무기다운 무기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는 하더라도 숫자가 많다는 그 자체가 무서운 폭력이 될 수 있었다.
유엔군사령부는 수용소를 크게 개편해야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수용소의 재편성을 목적으로 한 작전은 세 단계로 계획되었다. 즉 먼저 포로 전체를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로 분리하고, 다음으로 양분된 그들을 각기 서로 다른 수용소에 별도로 분산 수용하며, 마지막으로 수용소의 크기를 작게 만들어 관리하기에 용이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개인별 송환 희망과 송환거부를 위하여 심사에 응하는 포로들개인별 송환 희망과 송환거부를 위하여 심사에 응하는 포로들
세 단계 중에서 첫 번째 단계인 "분리(scatter) 작전", 즉 수용소 내에서 반공포로와 공산포로를 분리하는 일은 거제도에서는 1952년 4월 8일에 시작되어 4월 30일에 종료되었으며, 4월 15일에는 부산에서도 실시되었다. 이 작전은 포로 집단을 휴전 성립시에 북한 또는 중공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송환희망 포로와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송환거부 포로로 나눔으로써 서로 성격이 상이한 두 부류의 포로를 가시화하려는 것이었다. 이 일의 성공 여부는 모든 포로들을 대상으로 송환 희망과 송환 거부의 의사를 표시하는 심사를 실시할 수 있는가 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친공 수용소의 지도자들은 포로들의 심사를 끝까지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런 구역에서는 결국 찬성이나 반대의 의사를 묻는 심사를 실시하지 못한 채 이 단계의 작전은 일단락되었다.

제2단계인 "분산(Spreadout)작전"은 1952년 4월 19일에 시작되어서 5월 1일에 끝났는데, 이 작전은 송환 여부를 묻는 심사, 즉 분리작전에서 귀환을 강력하게 거부한 포로 (일명 반공포로)를 다른 수용소로 분산시키는 일이었다. 이 작전에서 거제도에 있던 약 82,000명의 송환거부 포로 및 민간인 억류자들이 육지에 세워진 4개의 새 수용소와 제주도로 이송되었다. 즉, 송환거부 북한 출신 포로는 부산, 광주, 논산에 세워진 제11, 15, 16수용소로, 그리고 남한 출신 포로는 마산 제12수용소로, 남한 민간인 억류자는 영천 제14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송환 거부 중국인 포로들은 제주도 모슬포에 새로이 설립된 제13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송환거부 한국인 남녀 환자포로는 동래에 새로이 문을 연 제10수용소의 부설 수용소로 옮겨졌다. 한편 송환희망 여자 환자포로는 부산으로부터 거제도로 수송되었다.
송환을 거부한 반공포로 가슴에 태극기를,양 팔뚝에 '멸공','애국'이라는 글씨를 새긴 반공포로, 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갈등으로 많은 포로들이 희생되었다.송환을 거부한 반공포로 가슴에 태극기를,양 팔뚝에 '멸공','애국'이라는 글씨를 새긴 반공포로, 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갈등으로 많은 포로들이 희생되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을 상대로 송환희망 여부를 조사 하고있다. 많은수의 포로가 귀환을 거부하자 친공포로들은 송환심사 거부시위를 하는 등 무력행사를 하였다.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을 상대로 송환희망 여부를 조사 하고있다. 많은수의 포로가 귀환을 거부하자 친공포로들은 송환심사 거부시위를 하는 등 무력행사를 하였다.
이와같은 재배치는 친공포로과 반공포로를 분리해내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 송환을 원하는 사람과 원하지 않는 사람을 분리하는 것이 본질적인 목적이었다. 그렇지만 친공과 반공의 구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포로 분리·분산수용작전 중에서 마지막 단계인 "소규모화(Breakup)작전" 1952년 5월과 7월에 걸쳐서 시행되었다. 이 작전의 골격은 7만명의 포로를 3등분하여 거제도, 제주도와 육지에 있는 작은 수용소에 분산 수용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거제도와 제주도의 여러 곳에 몇개의 새로운 - 보다 관리하기 좋은 크기의 - 보조 수용소를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기존 수용소 내의 수용동에는 5,000명 내지 6,000명이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관리·통제가 대단히 어려웠으며, 수용소 관리 당국의 힘으로는 인원 파악도 할 수 없었고 심지어 수용소 안에 들어가기도 어려웠다. 소위 '포로자치제'라는 명분하에 수용소 울타리 안은 포로의 천국이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을 근본적으로 개조하여 보다 관리하기 용이한 단위로 나누는 것이 이 작전의 목적이었다. 새로 만든 수용소 안에는 각각 500명을 수용하는 4개 로부터 8개의 작은 수용동(compound)을 만들었다. 요컨대, 전에는 한꺼번에 많은 인원을 편성해 넣던 큰 규모의 수용소를 이제 는 세분하여 보다 적은 인원을 기본으로 하는 소규모의 그룹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목적으로 구상된 새로운 작은 수용소들이 거제도의 남부에 있는 저구리, 거제도와 한산도의 사이에 있는 섬인 용초도와 봉암도, 그리고 제주도에 건설되었다.새로운 수용소를 건설하는 작업은 1952년 5월부터 시작되었고, 실질적인 '수송개시일 (Moving Day)' 은 6월 10일이었다. 이 작전을 위해서 유엔군사령관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제187공정연대와 네덜란드대대, 영국, 캐나다, 그리스중대 등을 거제도에 증원하여 무력행사를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5월 14일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장직을 맡은 보트너 준장이 이 작전을 지휘했다.
  • "친공포로"의 분산작전
    "친공포로"의 분산작전
친공포로들은 포로분리 및 분산에 불응하고 대응하자 수용소장의 명령에 의거 제187공정단 요원들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진입하고있다.친공포로들은 포로분리 및 분산에 불응하고 대응하자 수용소장의 명령에 의거 제187공정단 요원들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진입하고있다.
친공포로의 분산작업은 6월 4일에 시작되었는데, 이 경우는 시험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 2대의 전차를 선두로 한 제38연대는 북한기가 휘날리고 있는 제60, 제85, 제96구역에 차례 차례 돌입하여 깃대를 꺾어버리고 묶이거나 구타 당하여 마루에서 구르고 있는 반공포로 85명을 구출하였다. 쌍방 모두 사상자는 없었으며 시험은 성공적이었다.

6월 10일 드디어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보트너 준장은 먼저 친공포로의 아성인 제76수용소를 대상으로 포로들에게 이전 준비를 명령했다. 그러나 우려했던 대로 그들은 새 수용소로의 이동을 거부했다. 먼저 명령을 받은 제76수용소의 포로들은 움직이기를 거부했다. 포로수용소장은 그들에게 명령에 복종하도록 권고했으나, 그들은 칼, 창, 낫, 천막지주, 가솔린 폭탄 등으로 무장하고, 건물과 주변에 파놓은 참호에 들어박혀서 진입하는 군대에 대항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런 현상을 보자 수용소장은 제187공정단의 요원들에게 탱크를 동반하고 수용소에 진입하도록 명령했다.
이 과정에서 76수용소에서는 진압에 대응하기 위하여 제작된 창, 칼,화염병, 도끼 등이 수거되었다.이 과정에서 76수용소에서는 진압에 대응하기 위하여 제작된 창, 칼,화염병, 도끼 등이 수거되었다.
드디어 제187공정연대가 전진을 개시하면서 유탄발사기, 최루가스, 총검, 주먹으로 포로들을 참호에서 몰아 내고 이어서 6대의 전차가 돌진하여 결전 태세를 갖추고 있던 300명 정도의 포로에게 90밀리 포를 겨누었다. 약 3시간 동안의 접전 끝에 저항하던 포로들은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다.진입병력은 총에 장전은 했으나 사격은 하지 않았고, 포로들은 대부분 충격수류탄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이 과정에서 포로 31명이 죽고 13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미군은 1명이 죽고 14명이 부상을 입었다. 포로의 사망자 중에서 대부분은 이미 사형(私刑)으로 인하여 살해되어 있던 자들이었다.

포로들은 트럭에 실려 새로운 구역으로 이송되어 지문을 채취 당하고 새로운 번호가 붙은 포로 복장을 입었다. 이 수용소에 있던 이학구 대좌는 또다시 포로가 되었다. 76구역을 청소하자 창 3천개, 칼 4천 5백개, 화염병 1천개, 그외에 무수한 곤봉, 도끼, 유자철조망을 감은 대나무 막대기, 망치 등이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금속가공 기술을 배운 포로들이 쇳조각이나 천막의 지주 등을 가공해서 만든 것이었다.

저항의 핵심이 붕괴되는 것을 목격한 제73수용소의 포로들은 수용소장의 명령에 순순히 따랐다. 다음날 제77수용소에 있던 포로지휘자도 "평화적 이동"에 동의하여 약 6,000명의 포로들이 저항없이 이동했다. 이 수용소 배수구에는 16구의 시체가 구르고 있었다. 그들은 사형(私刑)에 처해진 반공포로인 것 같았다. 그후에 다른 수용소도 이에 따름으로써 포로분산작업은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미공간사에는 "공산주의자가 믿고 있는 것은 힘 뿐이다. 반항도 적대감도 실력을 보임으로써 만이 붕괴시킬 수가 있었다."라고 실력 행사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작전으로 약 12,000명의 북한 송환희망 포로들이 저구리(제17수용소)로, 8,000명의 북한 송환거부 포로들이 용초도(제18수용소)로, 10,000명의 민간인 억류자들이 봉암도(제19수용소)로, 그리고 5,600명의 중공군 포로들은 선박을 이용하여 제주도(제20수용소)로 수송되었다.
작전이 완료된 것은 1952년 7월 17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거제도의 기존 수용소, 즉 유엔사 관할 제1포로수용소에는 약 48,000명의 북한 친공포로들만이 남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포로 분리·분산작전은 다소의 마찰은 있었지만 성공적으로 실시되었다. 이것을 통해서 포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문제의 소지는 많이 감소된 것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포로수용소장을 납치하여 미국을 당황하게 만들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거제도 포로수용소' 는 이런 과정을 거치는 사이에 사실상 그 '위용' 이 사라지게 되었다. 같은 기간 동안에 부수적이면서도 상당히 중요한 또 하나의 중요한 작전이 병행 실시되었는데, 그것은 1952년 5월 23일부터 28일까지 이루어진 "철거(Removal)작전" 이었다. 이 작전은 한국 정부의 협조를 얻어 포로수용소 인근에 위치한 한국 사람들의 집과 시설들을 철거하여 미군 트럭으로 다른 지역에 옮기는 일이었다.
고현부두에서 육지로 이송되는 반공포로들고현부두에서 육지로 이송되는 반공포로들
거제도의 포로 수용동들은 서로 매우 가깝게 있어서 포로들이 한 수용동으로부터 다른 수용동으로 통신을 보내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또한 거제도의 20만 이상의 인구 중에서 7천명의 피란민들이 수용소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어서 수용소와 바같 세상과의 통신도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유엔군사령부는 북한으로부터 포로수용소안으로 정책 지령이 교묘하게 침투되고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공산군측은 그들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서 휴전협상과 포로의 투쟁 활동을 교묘하게 융합시키는 일을 계속해 왔던 것인데, 포로수용소에 인접해 있는 사람과 시설들을 수용소와 격리시킴으로써 그들의 통신·연락체계를 단절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친 결과 7월 초 포로수용소의 상황은 대단히 안정되었다. 그래서 미 제8군사령관은 포로 경비와 안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추가로 지원되었던 전투부대를 철수시켰다. 제64전차대 B중대가 한국을 떠나고, 7월 말까지 제187연대전투단이 미 제224 보병연대로 대체되었다. 증원되었던 한국군 부대들도 그들의 본래의 위치로 복귀하였다.
  • [표 1] 분리·분산작전 실시 이후의 포로수용소 (1952.8 현재)
[표 1] 분리·분산작전 실시 이후의 포로수용소 (1952.8 현재)(수용소명칭, 위치, 포로의 성격)
수용소명칭 위치 포로의 성격
POW Camp 1 거제도 송환희망 북한군인 및 민간인
POW 4Branch Camp 1a 거제도저구리 송환희망 북한군인
POW Branch Camp 1b 용초도 송환희망 북한군인
CI Branch Camp 1c 봉암도 송환희망 북한 민간인
POW Camp 2 부산(병원) 혼합
POW Branch Camp 2a 동래(부속병원) 혼합
POW Branch Camp 2a 서부산 송환거부
POW Camp 3 모슬포 송환거부 중공군인
POW Branch Camp 3a 제주시 송환희망 중공군인
CI Camp 4 영천 송환거부 북한군인
POW Camp 5 광주 송환거부 북한군인
POW Camp 6 논산 송환거부 북한군인
POW Camp6 마산 송환거부 민간인
  • 봉암도 및 용초도 사건
포로검열을 위하여 피복 소지품 등의 검사를 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친공포로들은 또다시 폭동을 준비하였다.포로검열을 위하여 피복 소지품 등의 검사를 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친공포로들은 또다시 폭동을 준비하였다.

포로송환의 일환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방문한 국제적십자연맹소속 공산측 임원이 포로들과 대화를 나누어서는 안된다는 규칙을 어겨 유엔군측 경비병들에 의해 끌려 나오고 있다.포로송환의 일환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방문한 국제적십자연맹소속 공산측 임원이 포로들과 대화를 나누어서는 안된다는 규칙을 어겨 유엔군측 경비병들에 의해 끌려 나오고 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좁은 장소에 많은 포로를 수용함으로써 포로 관리와 통제에 어려움이 있었고, 크고 작은 유혈 충돌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고 판단한 유엔군 당국에서는 그 타개책으로 포로를 성분별로 구분해서 소규모로 분리시키고, 또 그들을 여러 포로수용소로 분산시켰다. 그 중에서 친공포로가 수용된 대표적인 곳이 봉암도와 용초도였다. 봉암도는 거제도와 한산도 사이에 있는 작은 섬인데 이곳 수용소에는 민간인 억류자와 친공포로 약 9,000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경비하는 부대로서 한국군 1개 경비대대가 파견되어 있었다.

봉암도의 포로들은 1952년 6월에 이곳으로 이동하여 온 이래 처음에는 제반 규칙을 지키는 척하였으나 차차 그들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즉, 이 해 12월 4일 수용소 당국에서 제1동의 포로 검열을 위하여 피복, 소지품 등의 제시를 요구하였을 때 포로들은 정당한 이유없이 이를 거부하였다.

12월 6일에는 봉암도의 전체 친공포로들이 폭동을 일으켜 대거 탈출을 하려던 계획이 적발되었다. 다음 날인 7일에는 당국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친공포로 1,500명이 전투훈련을 실시했다. 또 10일에는 소수의 포로들이 병원 내의 미군 행정병을 구타하고 11일에는 제1동의 미군 동장을 습격 구타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포로들의 폭행 및 명령 거부 사건은 그후에도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는데, 14일에는 6개 소구역의 포로 3,600명이 합류하여 탈출 준비로 생각되는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기도 하였다. 수용소의 한국군 경비부대는 이 시위를 진압, 해산시키려고 수용소 안으로 들어 갔다. 그런데 포로들은 경비 병력을 향해 돌을 던지는 등 전면 공격을 해왔으므로, 처음에 경비대는 경고 사격 정도로 위협하다가 나중에는 결국 발포까지 하게 되었다. 포로들의 시위는 총을 사용함으로써 겨우 진압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쌍방에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포로측의 피해 상황은 알 수 없었으나 한국군 경비병은 4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일은 수용소 분산 후에 포로 관리당국과 포로들 사이에 발생한 커다란 충돌 사건으로서 공산포로들의 자연발생적인 폭동이 아니라 '전 세계가 미국인을 적으로 인정하도록' 유도함으로써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북한측이 지령을 내림으로써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군측은 포로들에게 지령을 내려 그들로 하여금 수용소 당국에 도전하여 충돌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렇게 하면 미군이 싸움에 말려 들게 되고, 그 결과 포로들에게서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게 되면 그것을 그들의 선전 전술에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2월 23일 미국의 소리 방송은 봉암도 사건에 대해 "이것은 공산군의 새로운 전술로서 용의주도한 사상 교육에 의한 난동이다." 라고 논평했다. 이 사건들이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라는 점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평양방송이나 북경 인민일보가 지체없이 포로 학살 행위라는 항의의 비난 방송과 보도를 하는 사실로도 뒷받침되었다. 실제로 실제로 공산군측은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선전에 이용하였는데, 그것은 '포로를 이용한 인해전술' 바로 그것이었다.

이 사건도 봉암도사건과 비슷한 것이었다. 공산군측은 이런 사건을 일으켜 휴전회담에서 그들의 발언권을 강화하려 하였고, 친공포로들은 귀환 후에 내보일 투쟁 실적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유엔군 당국은, 결과적으로 포로를 살상하게 되었으므로, 국제적십자사를 위시한 소위 인도주의를 주창하는 국가들로부터 비난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지만 유엔군측이 제네바협약에 따라 인도주의적인 포로 대우와 관리를 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차제에 이러한 폭거를 야기한, 전쟁포로사상 가장 악질적이며 호전적인 극렬 공산포로들을 끝까지 온건한 태도로 대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 포로 관리 당국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 포로의송환-거제도포로수용소 폐쇄
    포로의송환-거제도포로수용소 폐쇄
  • 상병포로의 송환
휴전회담 등 포로문제를 협상한 당시 판문점 전경휴전회담 등 포로문제를 협상한 당시 판문점 전경

링겔주사를 맞으며 들것에 실려 자유의 마을에 도착한 상병포로링겔주사를 맞으며 들것에 실려 자유의 마을에 도착한 상병포로
휴전회담에서 전쟁포로문제로 협상이 어렵게 되자 미국측은 부상을 입었거나 병든 포로를 우선적으로 교환하자는 제안을 공산군측에 보냈다. 우여곡절 끝에 양측은 1953년 4월 20일부터 상병포로를 교환하기로 합의하였다. 당초 공산군측은 한국인 450명과 유엔군 150명, 합계 600명의 상병포로를 보내겠다고 알려 왔으며, 유엔군측은 5,100명의 북한인과 700명의 중국인, 합계 5,800명을 보내겠다고 통보하였다.

상병포로 송환에 대한 협정이 성립되자, 쌍방은 포로를 인계ㆍ인수하는 일의 준비에 착수하였다. 유엔군사령부는 상병포로를 공산군측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리틀스워프 작전(operation little swap)"계획을 세웠다. 병참관구사령관(CG KCOMZ)은 포로 인도 및 인수작업을 위해 4월 5일에 문산에 임시 본부를 설치하였다. 이 작전하에서 송환될 대상인 북한 상병포로는 거제도 제1포로수용소와 제64야전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다.병참기지관구(KBS)는 거제도로부터 포로를 해상 수송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제3군용철도수송대(TMRS)는 부산으로부터 문산 북쪽 4km에 설치된 기차-구급차 환승지점(TASP)까지의 철도수송을 담당하였다. 이 환승 지점부터 석방 지점까지는 구급차가 포로를 수송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이 작전을 위하여 가장 먼저 거제도로부터 부산으로 선박 수송된 인원은 미 제279연대 L중대였다. 이 부대는 부산 부두에서 경비를 담당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들의 뒤를 이어서 LST를 타고 거제도로부터 여기까지 온 상병포로들은 4월 19일에 이곳 부산에서 기차편을 이용하여 환승지점까지 수송되었다.

유엔군측이 '리틀스워프 작전'이라고 이름 붙인 상병포로 교환 업무는 예정된 대로 4월 20일에 시작되어 5월 3일 마지막 상병포로를 공산측에 인계함으로써 종료되었다.

1951년 7월에 시작된 휴전회담이 근 2년간을 끌어오던중, 1953년 6월에 접어들어서 휴전회담의 핵심 적인 쟁점이었던 포로교환문제가 6월8일 타결 되고 양측 대표가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서 휴전협정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게되었다.

그러나, 한국민의 의사에 반한 휴전회담의 진전은 한국민을 크게 자극하였으며, 한국 전역에 걸쳐 거센 휴전반대 운동을 유발시켰다. 이무렵(6.6)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문제에 대한 성명을 통하여 "우리정부는 유엔군과 공산군이 일시에 한국에서 철수"하되, 이를 실시하기 전에 한.미 양국간에 공동 방위 조약을 체결할 것을 발표했으나, 받아들려지지 않자, 독단으로 당시에 유엔군이 수용 관리하고 있던 공산군 포로들 중 북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하고 있던 반공포로 34,000명 중 27,000명을 6.10 헌병 총사령관인 원용덕 중장을 직접 불러 지시, 비밀리에 진행하여, 6월 18일 00:00를 기하여 일제히 석방하여 그들에게 자유를 안겨 주어, 떳떳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활약케 했다.
반공포로의 석방은 일시에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되었다. 미국은 "한국이 유엔의 권한을 침범한 것이 아니냐"하는 항의를 제기하였고, 북한과 중공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공모하여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다고 비난하여 전원을 재 수용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타개되어가던 휴전회담을 무기한 연기시켰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러자, 당시 미국은 한국에서의 조속한 휴전 타결 문제가 주요 정치과제로 대두되어 있던 만큼 대통령의 특사를 6월 25일 파한하여 "이 대통령의 독단은 매우 무익한 일이며, 만약 사리에 맞는 태도를 취한다면, 미국의 힘을 빌려줄 것을 보증한다."고 확약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국정부는 미국으로부터 "휴전 후의 긴밀한 협조 관계의 확대, 포로의 자유의사 보장,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 정치·경제·방위 문제의 협력증진, 통일한국의 실현을 위한 상호 협력 등"을 보장받게 되었으며, 7월 12일 한·미양국은 휴전 성립을 위한 합의에 도달하였다.

이와 같은 반공포로의 석방은 자유를 갈망하여 공산군 포로 수용소내에서 공산군 포로들과 생명을 건 투쟁에서도 이념을 굽히지 않았던 수많은 포로들에게 자유의 길을 열어주었으며, 휴전 이후의 국가적 불이익에 대해서도 사전에 확실한 보장을 받을 수 있게한 한국전쟁을 마무리 짓는 중요한 조치였다.
  • 6.18 반공포로 대석방
이승만 사진 앞세운 반공포로 1954년 1월 막 석방된 반공 포로들이 대통령의 사진을 앞세우고 행진하고 있다.이승만 사진 앞세운 반공포로 1954년 1월 막 석방된 반공 포로들이 대통령의 사진을 앞세우고 행진하고 있다.

공산포로들이 태도 돌변 하여 1953년 8월 북한군 송환 포로들이 포로교환 지점에서 벗어던진 옷가지와 신발들이 길가에 널려있다.공산포로들이 태도 돌변 하여 1953년 8월 북한군 송환 포로들이 포로교환 지점에서 벗어던진 옷가지와 신발들이 길가에 널려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포로송환 협정에 따른 실행 계획은 포로송환위원회에서 토의되었다. 이 회합에서는 1953년 6월 8일에 체결한 포로송환 협정을 근거로 하여 8월 5일부터 포로송환을 개시하기로 하는 내용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곧 이어 포로송환을 위한 수송 대열이 남과 북에서 각각 판문점을 향하여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때 유엔군이 수용하고 있던 포로 중에서 송환희망 포로를 공산군측으로 인도하는 일을 다루기 위해 유엔군은 '빅스웝 작전 (Operation BIG SWAP)'을 계획하고 실시하였다.

송환을 희망한 포로, 즉 친공포로는 포로 분산 작전에 의해 대부분 거제도와 제주도에 집중 수용되어 있었으므로, 교환 지점까지 포로를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해로와 육로를 통한 일련의 수송 작전을 전개해야만 했다.

송환희망 포로 중에서 부상자 및 병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섬에서 부산까지 배로 수송되고, 다시 거기서 문산의 환승지점까지는 기차로 이동하여, 최종 교환지점에는 자동차 편으로 수송되었다. 다른 포로들은 인천으로 수송되어 여기서 육로로 문산까지 수송되었다.

이렇게 해서 1953년 9월 6일, 장장 33일간에 걸친 포로 송환 업무가 완료되었다. 거제도에 있던 포로(전부 북한군 친공포로)들은 모두 이송되었으므로, 그토록 소란스럽던 거제도 포로수용소도 일시에 정적에 휩싸이게 되었고, 곧 폐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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